◈ 향기로운/◈좋은글

류시화,이해인,이정하

초록정원1 2008. 2. 13. 07:15

류시화

♣ 여행자를 위한 서시 / 류시화

 

 

날이 밝았으니 이제

여행을 떠나야 하리

시간은 과거의 상념 속으로 사라지고

영원의 틈새를 바라본 새처럼

그대 길 떠나야 하리

 

다시는 돌아오지 않으리라

그냥 저 세상 밖으로 걸어가리라

한때는 불꽃 같은 삶과 바람 같은 죽음을 원했으니

새벽의 문 열고

여행길 나서는 자는 행복하여라

 

아직 잠들지 않은 별 하나가

그대의 창백한 얼굴을 비추고

그대는 잠이 덜 깬 나무들 밑을 지나

지금 막 눈을 뜬 어린 뱀처럼

홀로 미명 속을 헤쳐가야 하리

이제 삶의 몽상을 끝낼 시간

순간 속에 자신을 유폐시키던 일도 이제 그만

종이꽃처럼 부서지는 환영에

자신을 묶는 일도 이제는 그만

날이 밝았으니, 불면의 베개를

머리맡에서 빼내야 하리

 

오, 아침이여

거짓에 잠든 세상 등 뒤로 하고

깃발 펄럭이는 영원의 땅으로

홀로 길 떠나는 아침이여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은 자

혹은 충분히 사랑하기 위해 길 떠나는 자는 행복하여라

그대의 영혼은 아직 투명하고

사랑함으로써 그것 때문에 상처입기를 두려워하지 않으리

 

그대가 살아온 삶은

그대가 살지 않은 삶이니

이제 자기의 문에 이르기 위해 그대는

수많은 열리지 않는 문들을 두드려야 하리

자기 자신과 만나기 위해 모든 이정표에게

길을 물어야 하리

 

길은 또다른 길을 가리키고

세상의 나무 밑이 그대의 여인숙이 되리라

별들이 구멍 뚫린 담요 속으로 그대를 들여다보리라

그대는 잠들고 낯선 나라에서

모국어로 꿈을 꾸리라

 

 

♣ 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보지 않는다 / 류시화

 

 

시를 쓴다는 것이

더구나 나를 뒤돌아본다는 것이

싫었다, 언제나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은 나였다

 

다시는 세월에 대해 말하지 말자

내 가슴에 피를 묻히고 날아간 새에 대해

나는 꿈꾸어선 안 될 것들을 꿈꾸고 있었다

 

죽을 때까지 시간을 견뎌야 한다는 것이

나는 두려웠다

 

다시는 묻지 말자

내 마음을 지나 손짓하며 사라진 그것들을

저 세월들을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것들을

 

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보는 법이 없다

고개를 꺾고 뒤돌아보는 새는

이미 죽은 새다

♣ 우리는 한때 두 개의 물방울로 만났었다 / 류시화

 

 

우리는 한때

두 개의 물방울로 만났었다

물방울로 만나 물방울의 말을 주고받는

우리의 노래가 세상의 강을 더욱 깊어지게 하고

세상의 여행에 지치면 쉽게

한 몸으로 합쳐질 수 있었다

사막을 만나거든

함께 구름이 되어 사막을 건널 수 있었다

 

그리고 한때 우리는

강가에 어깨를 기대고 서 있던 느티나무였다

함께 저녁강에 발을 담근 채

강 아래쪽에서 깊어져 가는 물소리에 귀 기울이며

우리가 오랜 시간 하나였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바람이 불어도 함께 기울고 함께 일어섰다

번개도 우리를 갈라 놓지 못했다

 

우리는 그렇게 영원히 느티나무일 수 없었다

별들이 약속했듯이

우리는 몸을 바꿔 늑대로 태어나

늑대 부부가 되었다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았지만

늑대의 춤을 추었고

달빛에 드리워진 우리 그림자는 하나였다

사냥꾼의 총에 당신이 죽으면

나는 생각만으로도 늑대의 몸을 버릴 수 있었다

 

별들이 약속했듯이

이제 우리가 다시 몸을 바꿔 사람으로 태어나

약속했던 대로 사랑을 하고

전생의 내가 당신이었으며

당신의 전생은 또 나였음을

별들이 우리에게 확인시켜 주었다

그러나 당신은 왜 나를 버렸는가

어떤 번개가 당신의 눈을 멀게 했는가

 

이제 우리는 다시 물방울로 만날 수 없다

물가의 느티나무일 수 없고

늑대의 춤을 출 수 없다

별들의 약속을 당신이 저버렸기에

그리하여 별들이 당신을 저버렸기에

 

♣ 길 위에서의 생각 / 류시화

 

 

집이 없는 자는 집을 그리워하고

 

집이 있는 자는 빈 들녘의 바람을 그리워한다

 

나 집을 떠나 길 위에 서서 생각하니

 

삶에서 잃은 것도 없고 얻은 것도 없다

 

모든 것들이 빈 들녘의 바람처럼

 

세월을 몰고 다만 멀어져갔다

 

 

어떤 자는 울면서 웃을 날을 그리워하고

 

웃는 자는 또 웃음 끝에 다가올 울음을 두려워한다

 

나 길가에 피어난 풀에게 묻는다

 

나는 무엇을 위해서 살았으며

 

또 무엇을 위해 살지 않았는가를

 

 

살아있는 자는 죽을 것을 염려하고

 

죽어가는 자는 더 살지 못했음을 아쉬워한다

 

자유가 없는 자는 자유를 그리워하고

 

어떤 나그네는 자유에 지쳐 길에서 쓰러진다

♣ 나 비 / 류시화

 

 

달이 지구로부터 달아날 수 없는 것은

 

지구에 달맞이꽃이 피었기 때문이다

 

지구가 태양으로부터 달아날 수 없는 것은

 

이제 막 동그라미를 그려낸

 

어린 해바라기 때문이다

 

 

 

아침에 눈을 뜨면 세상은

 

나비 한 마리로 내게 날아온다

 

내가 삶으로부터 달아날 수 없는 것은

 

너에 대한 그리움 때문

 

지구가 나비 한 마리를 감추고 있듯이

 

세상이 내게서

 

너를 감추고 있기 때문

 

 

 

파도가 바다로부터 달아날 수 없는 것은

 

그 속에서 장난치는 어린 물고기 때문이다

 

바다가 육지로부터 달아날 수 없는 것은

 

모래에 고개를 묻고 한 치 앞의 생을 꿈꾸는

 

늙은 해오라기 때문이다

 

 

 

아침에 너는 나비 한 마리로

 

내게 날아온다

 

달이 지구로부터 달아날 수 없는 것은

 

나비의 그 날개짓 때문

 

지구가 태양으로부터 달아날 수 없는 것은

 

너에 대한 내 그리움 때문

♣ 안개 속에 숨다 / 류시화

 

나무 뒤에 숨는 것과 안개 속에 숨는 것은 다르다

나무 뒤에선

인기척과 함께 곧 들키고 말지만

안개속에서는

가까이 있으나 그 가까움은 안개에 가려지고

멀리 있어도 그 거리는 안개에 채워진다

산다는 것은 그러한 것

때로 우리는 서로 가까이 있음을 견디지 못하고

때로는 멀어져 감을 두려워한다

안개속에 숨는 것은 다르다

나무 뒤에선 누구나 고독하고,

 

그 고독을 들킬까 굳이 염려하지만

안개속에서는

삶에서 혼자인 것도 여럿인 것도 없다

그러나 안개는 언제까지나 우리 곁에 머무를 수 없는 것

시간이 가면

안개는 걷히고 우리는 나무들처럼

적당한 간격으로 서서

서로를 바라본다

산다는 것은 결국 그러한 것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게

시작도 끝도 알지 못하면서

안개 뒤에 나타났다가 다시 안개 속에 숨는 것

나무 뒤에 숨는 것과 안개 속에 숨는 것은 다르다

 

 

 

 

 

♣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 류시화

 

 

물 속에는

물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는

그 하늘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내 안에는

나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내 안에 있는 이여

내 안에서 나를 흔드는 이여

물처럼 하늘처럼 내 깊은 곳 흘러서

은밀한 내 꿈과 만나는 이여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 슬픔에게 안부를 묻는다 / 류시화

 

 

너였구나

나무 뒤에 숨어 있던 것이

 

인기척에 부스럭거려서 여우처럼 나를 놀라게 하는 것이

슬픔, 너였구나

 

나는 이 길을 조용히 지나가려 했었다

날이 저물기 전에

서둘러 이 겨울숲을 떠나려고 했었다

 

그런데 그만 너를 깨우고 말았구나

내가 탄 말도 놀라서 사방으로 두리번거린다

 

숲 사이 작은 강물도 울음을 죽이고

잎들은 낮은 곳으로 모인다

 

여기 많은 것들이 변했지만 또

하나도 변하지 않은 것이 있다

 

한때 이곳에 울려퍼지던 메아리의 주인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나무들 사이를 오가는 흰새의 날개들 같던

그 눈부심은

 

박수치며 날아오르던 그 세월들은

너였구나

 

이 길 처음부터 나를 따라오던 것이

서리 묻은 나뭇가지를 흔들어 까마귀처럼 놀라게 하는 것이

 

너였구나

나는 그냥 지나가려 했었다

 

서둘러 말을 타고 이 겨울숲과 작별하려 했었다

그런데 그만 너에게 들키고 말았구나

 

슬픔, 너였구나

이 해인

 

♣ 너에게 띄우는 글 / 이 해인

 

 

사랑하는 사람이기보다는 진정한 친구이고 싶다.

다정한 친구이기 보다는 진실이고 싶다.

 

내가 너에게 아무런 의미를 줄 수 없다 하더라도

너는 나에게 만남의 의미를 전해 주었다.

 

순간의 지나가는 우연이기 보다는

영원한 친구로 남고 싶었다.

 

언젠가는 헤어져야할 너와 나이지만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을 수 있는 친구이고 싶다.

 

모든 만남이 그러하듯

너와 나의 만남을 영원히 간직하기 위해

진실로 너를 만나고 싶다.

 

그래, 이제 더 나이기보다는 우리이고 싶었다.

우리는 아름다운 현실을

언제까지 변치 않는 마음으로 접어두자.

 

비는 싫지만 소나기는 좋고

인간은 싫지만 너만은 좋다.

 

내가 새라면 너에게 하늘을 주고

내가 꽃이라면 너에게 향기를 주겠지만

나는 인간이기에 너에게 사랑을 준다.

 

 

 

 

♣ 친구에게 / 이 해인

 

 

부를때마다 내 가슴에서 별이 되는 이름

존재 자체로 내게 기쁨을 주는 친구야

오늘은 산숲의 아침 향기를 뿜어내며

뚜벅뚜벅 걸어와서 내 안에

한 그루 나무로 서는

그리운 친구야

 

때로는 저녁노을 안고 조용히

흘러가는 강으로 내 안에 들어와서

나의 메마름을 적셔 주는 친구야

어쩌다 가끔은 할말을 감추어 둔 한 줄기

바람이 되어 내 안에서 기침을 계속하는

보고 싶은 친구야

 

보고 싶다는 말 속에 들어 있는

그리움과 설레임 파도로 출렁이는

내 푸른 기도를 선물로 받아 주겠니?

늘 받기만 해서 미안하다고 말할 때 빙긋 웃으며

내 손을 잡아 주던 따뜻한 친구야

너에게 하고 싶은 말들이 모였다가 어느 날은

한 편의 시가 되고 노래가 되나 보다

 

때로는 하찮은 일로 너를 오해하는 나의

터무니없는 옹졸함을..나의 이기심과 허영심과

약점들을 비난보다는 이해의 눈길로 감싸 안는

친구야 하지만 꼭 필요할 땐 눈물나도록

아픈 충고를 아끼지 않는

진실한 친구야

 

내가 아플 때엔 제일 먼저 달려오고

슬픈 일이 있을 때엔 함께 울어 주며

기쁜 일이 있을 때엔 나보다 더 기뻐해 주는

고마운 친구야 고맙다는 말을 자주

표현 못했지만 세월이 갈수록

너는 또 하나의 나임을 알게 된다.

 

너를 통해 나는

사랑하는 법을 배우고 기뻐하는 법을 배운다.

참을성 많고 한결같은 우정을 통해

나는 하나님을 더욱 가까이 본다.

늘 기도해 주는 너를 생각하면 나는

함부로 행동할 수가 없다. 나도 너에게 끝까지

성실한 벗이 되어야겠다고

새롭게 다짐해 본다.

 

우리가 서로를 이해 못해 힘든 때도 있었지만

화해와 용서를 거듭하며 오랜 세월 함께

견뎌 온 우리의 우정을 감사하고 자축하며

오늘은 한 잔의 차를 나누자

우리를 벗이라 불러 주신 주님께

정답게 손잡고 함께 갈 때까지

 

우리의 우정을 더 소중하게 가꾸어 가자.

아름답고 튼튼한 사랑의 다리를 놓아

많은 사람들이 춤추며 지나가게 하자.

 

누구에게나 다가가서 좋은 벗이 되셨던

주님처럼 우리도 모든 이에게

마음의 문을 여는 행복한 이웃..

행복한 세상을 만드는 벗이 되자.

 

이름을 부르면 어느새 내 안에서

푸른 가을 하늘로 열리는

그리운 친구야...

♣ 해바라기 연가 /이 해 인

 

 

 

내 생애가 한번 뿐이듯

나의 사랑도 하나입니다.

 

나의 임금이여

폭포처럼 쏟아져 오는 그리움에

목메어 죽을 것만 같은

열병을 앓습니다.

 

당신아닌 누구도

치유할 수 없는

불치의 병은

사랑

 

이 가슴 안에서 올올이 뽑은 고운실로

당신의 비단옷을 짜겠습니다.

 

빛나는 얼굴 눈부시어

고개숙이면

속으로 타서 익은 까만 꽃씨

당신께 바치는 나의 언어들.

 

이미 하나인 우리가

더욱 하나될 날을 확인하고 싶습니다.

 

나의 임금이여..

드릴 것은 상처 뿐이어도

어둠에 숨지지 않고

섬겨살기 원이옵니다.

 

 

 

 

♣ 꽃씨를 닮은 마침표처럼 /이 해 인

 

 

내가 심은 꽃씨가

처음으로 꽃을 피우던 날의

그 고운 설레임으로

 

며칠을 앓고 난 후

창문을 열고

푸른 하늘을 바라볼 때의

그 눈부신 감동으로

 

비온 뒤의 햇빛 속에

나무들이 들려주는

그 깨끗한 목소리로

 

별것 아닌 일로

마음이 꽁꽁 얼어 붙었던

친구와 오랜만에 화해한 후의

그 티없는 웃음으로

나는 항상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싶다

 

못 견디게 힘든 때에도

다시 기뻐하고

다시 시작하여

 

끝내는 꽃씨를 닮은 마침표 찍힌

한통의 아름다운 편지로

매일을 살고 싶다

 

 

♣슬픈 날의 편지 / 이해인

 

모랫벌에 박혀 있는 하얀 조가비처럼

 

내 마음속에 박혀 있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어떤 슬픔 하나 하도 오래되어

 

정든 슬픔 하나는 눈물로도 달랠 길 없고

 

그대의 따뜻한 말로도 위로가 되지 않습니다.

 

내가 다른 이의 슬픔 속으로

 

깊이 들어갈 수 없듯이 그들도

 

나의 슬픔 속으로 깊이 들어올 수 없음을

 

담담히 받아들이며 지금은 그저

 

혼자만의 슬픔 속에 머무는 것이

 

참된 위로이며 기도입니다.

 

슬픔은 오직 슬픔을 통해서만 치유된다는 믿음을

 

언제부터 지니게 되었는지 나도 잘 모르겠습니다.

 

사랑하는 이여 항상 답답하시겠지만

 

오늘도 멀찍이서 지켜보며

 

좀 더 기다려주십시오

 

이유 없이 거리를 두고

 

그대를 비켜가는 듯한 나를

 

끝까지 용서해달라는

 

이 터무니없음을 용서하십시오

♣별을 보며 / 이해인

 

고개가 아프도록

별을 올려다본 날은

꿈에도 별을 봅니다

 

반짝이는 별을 보면

반짝이는 기쁨이

내 마음의 하늘에도

쏟아져 내립니다

 

많은 친구들과 어울려 살면서도

혼자 일줄 아는 별

조용히 기도하는 모습으로

제자리를 지키는 별

나도 별처럼 살고 싶습니다

 

얼굴은 작게 보여도

마음은 크고 넉넉한 별

먼데까지 많은 이를 비추어 주는

나의 하늘 친구 별

 

나도 날마다

별처럼 고운 마음

반짝이는 마음으로 살고 싶습니다

 

♣ 한 송이 수련으로/이해인

 

내가 꿈을 긷는 당신의 못 속에

하얗게 떠다니는 한 송이

수련으로 살게 하소서

 

겹겹이 쌓인 평생의 그리움

물 위에 풀어 놓고

그래도 목말라 물을 마시는 하루

 

도도한 사랑의 불길조차

담담히 다스리며 떠다니는

당신의 꽃으로 살게 하소서

 

밤마다

별을 안고 합장하는

물빛의 염원

 

단 하나의 영롱한 기도를

어둠의 심연에서 건져내게 하소서

 

나를 위해

순간마다 연못을 펼치는 당신

 

그 푸른 물 위에

말없이 떠다니는

한 송이 수련으로 살게 하소서

 

♣ 6월엔 내가 / 이해인

 

숲속에 나무들이

일제히 낯을 씻고

환호하는 유월

 

6월엔 내가

빨갛게 목타는

장미가 되고

 

끝없는 산향기에

흠뻑 취하는

뻐꾸기가 된다.

 

생명을 향해

하얗게 쏟아 버린

아카시아 꽃타래

 

6월엔 내가

사랑하는 이를 위해

더욱 살아

 

산기슭에 엎디어

찬비 맞아도 좋은

바위가 된다

 

 

♣ 길들이는 시간 / 이해인

 

홀로 있는 시간은

쓸쓸하지만 아름다운 호수가 된다

바쁘다고 밀쳐두었던 나 속의 나를

조용히 들여다볼 수 있으므로

 

여럿 속에 있을 땐

미처 되새기지 못했던

삶의 깊이와 무게를

고독 속에 헤아려볼 수 있으므로

 

내가 해야 할 일 안해야 할 일

분별하며 내밀한 양심의 소리에

더 깊이 귀기울일 수 있으므로

 

그래

혼자 있는 시간이야말로

내가 나를 돌보는 시간

여럿 속의 삶을

더 잘 살아내기 위해

고독속에

나를 길들이는 시간이다

 

♣ 벗에게 1 / 이해인

내 잘못을 참회하고 나서

처음으로 맑고 투명해진

나의 눈물 한 방울

너에게 선물로 주어도 될까?

때로는 눈물도

선물이 된다는 걸

너를 사랑하며 알았어

눈물도 아름다운

사랑의 표현임을

네가 가르쳐주었어

나와의 첫 만남을

울면서 감격하던 너

 

너를 너무 사랑하게 될까봐

두려웠던 내 마음

이해하면서도 힘들었지?

 

나를 기다려주어 고맙고

나를 용서해주어 고맙고

그래서 지금은 내가 울고 있잖아

 

♣ 벗에게 2 / 이해인

내가 누구인지

벗이여

오늘은 그대에게 묻고 싶다

 

잠에서 깨어나

거울 앞에서 바라보는

낯선 얼굴의 나

 

밤길을 걷다

나를 따라붙는

나보다 큰

 

나의 검은 그림자가

두렵고 낯설었다

 

이젠 내가 나와 친해질 나이도 되었는데

갈수록 나에게서 멀어지는 슬픔

 

나를 찾지 못한 부끄러움에

오늘도 시름시름 앓고 있는 내게

 

벗이여

무슨 말이라도 해다오

 

 

 

♣ 벗에게 3 / 이해인

 

내가 죽더라도

너는 죽지 않으면 좋겠다

꼭 죽어야 한다면

내가 먼저 죽으면 좋겠다

아니, 더 솔직히 말하면

같은 날 같은 시에 죽으면 좋겠다

이 또한

터무니 없는 욕심이라고

너는 담담히 말을 할까

 

우정보다 더 길고 깊은

하나의 눈부신 강이 있다면

그 강에 너를 세우겠다

사랑보다 더 높고 푸른

하나의 신령한 산이 있다면

그 산에 너를 세우겠다

내게 처음으로

하늘과 사람의 아름다움을 보여준

내 목숨보다

귀한 벗이여

 

 

♣ 플라토닉 사랑 / 이해인

 

우정이라 하기에는 너무 오래고

 

사랑이라 하기에는 너무 이릅니다.

 

당신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다만

 

좋아한다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남남이란 단어가 맴돌곤 합니다

 

어처구니 없이

 

난 아직 당신을 사랑하고 있지는 않지만

 

당신을 좋아한다고는 하겠습니다

 

외롭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외로운 것입니다

 

누구나 사랑할 때면

 

고독이 말없이 다가옵니다

 

당신은 아십니까..

 

사랑할수록 더욱 외로와 진다는 것을.

 

 

♣ 아름다운 순간들 / 이해인

 

 

마주한 친구의 얼굴 사이로,

 

빛나는 노을 사이로,

 

해 뜨는 아침 사이로..

 

바람은 우리들 세계의

 

공간이란 공간은 모두 메꾸며

 

빈자리에서 빈자리로 날아다닌다.

때로는 나뭇가지를 잡아흔들며,

 

때로는 텅빈 운동장을 돌며,

 

바람은 끊임없이 자신의 존재를

 

우리에게 이야기한다.

 

이 아름다운 바람을 볼 수 있으려면

 

오히려 눈을 감아야 함을

 

우리에게 끊임없이 속삭이고 있다.

 

 

♣ 향기로운 말 / 이해인

 

매일 우리가 하는 말은

역겨운 냄새가 아닌

행기로운 말로

향기로운 여운을 남기게 하소서

우리의 모든 말들이

이웃의 가슴에 꽃히는

기쁨의 꽃이 되고

평화의 노래가 되어

세상이 조금씩 더 밝아지게 하소서

 

 

누구에게도 도움이 될 리 없는

험담과 헛된 소문을

실어 나르지 않는 깨끗한 마음으로

깨끗한 말을 하게 하소서

 

 

늘 상대방의 입장을 헤아리는

사랑의 마음으로

사랑의 말을 하게 하지고

 

 

남의 나쁜 점보다는

좋은 점을 먼저 보는

긍정적인 마음으로

긍정적인 말을 하게 하소서

 

 

매일 정성껏 물을 주어

한포기의 난을 가꾸듯

침묵과 기도의 샘에서 길어 올린

지혜의 맑은 물로

우리의 말씨를 가다듬게 하소서

겸손의 그윽한 향기

그 안에 스며들게 하소서

 

 

♣ 기대어 울 수 있는 한 가슴 / 이정하

 

 

비를 맞으면 걷는 사람에겐 우산보다

 

함께 걸어줄 누군가가 필요한 것임을

 

울고 있는 사람에겐 손수건 한장보다

 

기대어 울 수 있는 한 가슴이

 

더욱 필요한 것임을.

 

 

그대를 만나고서부터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그대여, 지금 어디 있는가.

 

보고 싶다 보고 싶다

 

말도 못할 만큼

 

그대가 그립습니다.

 

 

 

♣ 이쯤에서 다시 만나게 하소서 / 이정하

 

 

그대에게 가는 길이 멀고 멀어

 

늘 내 발은 부르터 있기 일쑤였네.

 

한시라도 내 눈과 귀가

 

그대 향해 열려 있지 않은 적 없었으니

 

이쯤에서 그를 다시 만나게 하소서.

 

 

볼 수는 없지만 느낄 수는 있는 사람.

 

생각지 않으려 애쓰면 더욱 생각나는 사람.

 

그 흔한 약속 하나 없이 우린 헤어졌지만

 

여전히 내 가슴에 남아 슬픔으로 저무는 사람.

 

내가 그대를 보내지 않는 한

 

언제까지나 그대는 나의 사랑이니

 

이쯤에서 그를 다시 만나게 하소서.

 

 

찬이슬에 젖은 잎새가 더욱 붉듯

 

우리 사랑도 그처럼 오랜 고난 후에

 

마알갛게 우러나오는 고운 빛깔이려니,

 

함께 한 시간은 얼마 되지 않지만

 

그로 인한 슬픔과 그리움은

 

내 인생 전체를 삼키고도 남으니

 

이쯤에서 그를 다시 만나게 하소서.

 

 

 

♣ 참회 / 이정하

 

 

때로는

 

서럽게 울고 싶은 때가 있네

 

아무도 보지 않는 데서 넋두리도 없이

 

오직 나 자신만을 위하여 정갈하게 울고 싶네

 

그리하여 눈물에 흠씬 젖은 눈과

 

겸허한 가슴을 갖고 싶네

 

 

그럴 때의 내 눈물은

 

나를 열어가는 정직한 자백과 뉘우침이 될 것이다.

 

가남하지만 새롭게 출발할 것을 다짐하는

 

내 기도의 첫 구절이 될 것이다.

 

 

♣ 고슴도치 사랑 / 이정하

 

 

서로 가슴을 주어라.

 

그러나 소유하려고는 하지 말라.

 

소유하고자 하는 그 마음 때문에

 

고통이 생기나니.

 

 

추운 겨울날,

 

고슴도치 두 마리가 서로 사랑햇네.

 

추위에 떠는 상대를 보다못해

 

자신의 온기만이라도 전해주려던 그들은

 

가까이 다가가면 갈수록 상처만 생긴다는 것을 알았네

 

안고 싶어도 안지 못했던 그들은

 

멀지도 않고 자신들의 몸에 난 가시에 다치지도 않을

 

적당한 거리에 함께 서 있었네.

 

비록 자신의 온기를 다 줄 수 없었어도

 

그들은 서로 행복했네.

 

행복할 수 있었네.